바실리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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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오스 1세는 811년(혹은 830년대)에 태어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아르메니아계 농민 출신으로 불가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황제 미카엘 3세의 측근이 되어 권력을 얻었다. 바르다스를 암살하고 미카엘 3세를 살해한 후 황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법률 개정, 건축 사업,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886년 사냥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레오 6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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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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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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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바실리우스 1세 마케도니아인 |
로마자 표기 | Basileios o Makedōn |
통치 | |
작위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867년 9월 24일 – 886년 8월 29일 |
선임 황제 | 미하일 3세 |
후임 황제 | 레오 6세 |
대관식 | 866년 5월 26일 (공동 황제로) |
대관식 종류 | 대관식 |
섭정 | 콘스탄티누스 (868–879), 레오 6세 (870–886), 알렉산드로스 (879–886) |
가문 | |
왕조 | 마케도니아 왕조 |
배우자 | 마리아,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
자녀 | 콘스탄티누스, 알렉산드로스, 레오 6세, 스테파노스 1세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811년 말 |
출생지 | 차리오폴리스, 마케도니아, 동로마 제국 |
사망 | 886년 8월 29일 |
종교 |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바르다스 (Bardas) |
어머니 | 판칼로 (Pankalo) |
2. 생애
바실리오스 1세는 테마 마케도니아(현재의 에디르네) 인근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칸 오무르타그에게 도나우 강 북쪽으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다.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올라가 아모리아 왕조의 미카엘 3세에게 발탁되어 황제의 경호원이 되었다. 865년에는 황제의 침실 관리 장관이 되었고, 미카엘 3세의 애인이었던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결혼했다. 바실리오스는 이미 마리아라는 아내가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혼당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바실리오스는 황제의 삼촌 카이사르 바르다스와 충돌했고, 866년 4월에 바르다스를 암살했다. 이후 미카엘 3세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867년 9월 23일 미카엘 3세를 암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를 해임하고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개종 문제 등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했고, 872년경 포티오스를 사면하고 877년에는 총대주교로 재임명했다.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바실리오스는 소아시아의 파울리안파를 879년까지 격멸했고, 키프로스를 7년간 지배했으며, 달마티아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878년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잃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885년 남이탈리아 (마그나 그라에키아)를 재정복했다. 해상에서는 니케타스 오오리우파스가 이슬람 함대에 승리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카이눌기온 궁전과 네아 에클레시아 등 건축물을 조영·수리했다. 포티오스 등에게 법률서 편찬을 명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 개정은 아들 레오 6세 시대에 『바실리카 법전』으로 완성되었다.
879년 장남 콘스탄티노스가 요절하여 레오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바실리오스와 레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83년 레오를 유폐했다가 886년 7월 사면했다. 바실리오스는 886년 8월 29일 사냥 중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암살설도 있다.
2. 1. 아르메니아 출신 농부에서 황제로
바실리오스 1세는 811년 말 (혹은 일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830년대) 비잔틴 제국의 마케도니아 테마(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의 차리오폴리스에서 농민 부모에게서 태어났다.[1][2] 그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 농부였으며, 바실리오스는 어린 시절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서 포로로 보내기도 했다.[1]바실리오스는 그리스어를 아르메니아어 억양으로 형편없이 구사했고 글도 몰랐지만, 힘이 매우 세고 말을 잘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30] 이러한 능력 덕분에 황제 미카일 3세의 눈에 띄어 황궁으로 들어와 황제의 개인 경호원이자 친구가 되었고,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황제의 시종장이 되었다.





미카일 3세의 명령에 따라 바실리오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황제의 애인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결혼했다. 866년 9월 19일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낳은 아들 레오는 바실리오스가 아닌 미카일 3세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이 소문이 거의 일반적이었고 바실리오스가 평생 레오를 미워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로 보인다.[30]
시종장으로서 바실리우스는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고, 황제의 외삼촌 바르다스와 갈등을 빚었다. 866년 바실리우스는 바르다스를 암살하고, 미카일 3세를 부추겨 자신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미카일 3세가 알코올 중독 등으로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바실리우스를 멀리하고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867년 9월 24일 미카일 3세를 암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10]
2. 2. 황제 즉위와 통치
로마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를 해임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래로 서방의 제국 영토 회복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정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목적으로 사절을 제국으로 파견하였고 869년부터 870년까지 공의회를 열었는데 때마침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 오는 일이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이를 기회로 불가리아를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교황과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15]비슷한 시기 서방황제인 루트비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의 사라센을 몰아내는 데 도와줄 것을 요청해 왔고 이에 응답하여 바실리우스는 871년 해군 함대를 지원군으로 보내어 사라센족의 거점인 바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다시 서방제국과의 사이가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바실리우스가 루트비히를 단순히 프랑크 국왕이라고만 불렀고, 루트비히도 스스로를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orum'')로 칭하여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15]
바실리우스 1세는 테마 마케도니아(아드리안노플, 현재의 에디르네) 인근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어쩌면 그 자신도) 한때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칸 오무르타그에게 도나우 강 북쪽으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다. 바실리오스는 처음에는 테마 마케도니아의 장관인 찬체스에게 고용되었지만,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아모리아 왕조 3대 황제인 미카엘 3세의 일족이자 성벽 방어 장관이었던 테오필리체스에게 고용되었지만, 이윽고 미카엘 3세의 눈에 띄어 황제의 경호원으로 발탁되었다. 865년에는 황제의 침실 관리 장관이 되었고, 미카엘 3세의 애인이었던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결혼했다. 당시 바실리오스는 이미 마리아라는 아내가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혼당하고 고향인 테마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내졌다. 바실리오스의 급격한 출세는 황제의 삼촌이자 제국의 실력자였던 카이사르 (부제) 바르다스와의 충돌을 일으켰다. 그래서 바실리오스는 866년 4월에 계략을 꾸며 바르다스를 암살했고, 다음 달에는 미카엘 3세에 의해 공동 황제의 지위를 받았지만 군대, 시민, 관료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 후 바실리오스는 미카엘 3세와도 충돌했고, 최종적으로 바실리오스는 867년 9월 23일 새벽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의 성 마마스 이궁에서 술에 취해 잠든 미카엘 3세를 암살하고 다음날 궁전을 점령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당시 로마 교황과 격렬하게 대립하던 포티오스를 해임하고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개종 문제 등으로 점차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되었고, 국내의 성직자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포티오스를 872년경에 사면하고, 877년에는 총대주교로 재임명했다. 불가리아는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바실리오스는 군사적으로도 다양한 공적을 남겼다. 먼저 미카엘 3세 시대부터 소아시아 반도에서 큰 세력을 떨치던 파울리안파에 여러 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879년까지 그들의 세력을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이슬람 세력과의 공유지였던 키프로스를 7년간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달마티아 지방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는 데에도 성공했다.
한편 시칠리아 섬에서는 아글라브 왕조의 공세를 막을 수 없어, 878년에 제국 최대의 거점이었던 시라쿠사를 잃었다. 반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중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루이 2세)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축출을 진행했다. 885년에는 명장 니케포로스 포카스 (후의 동로마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조부)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남 이탈리아 (마그나 그라에키아)를 재정복했다. 이후 11세기까지 남 이탈리아는 제국령으로 남았다. 해상에서는 니케타스 오오리우파스가 이끄는 함대가 코린토스 만 (코린티아코스 만)에서 이슬람 함대에 승리하는 등의 전과가 있었지만, 크레타 섬이나 시칠리아 섬, 북아프리카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이슬람 함대의 활동을 완전히 봉쇄할 수는 없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등에서 수많은 건축물을 조영·수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카이눌기온 궁전과 네아 에클레시아 ("새로운 교회"의 의미)가 유명하다. 또한 포티오스 등에게 명령하여 『프로케이론(법률 편람)』, 『에이사고게(법률 서설)』(일반적으로 『에파나고게』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음)라고 불리는 법률서를 편찬하게 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을 개정하려 시도했다. 이것은 그의 재위 중에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아들인 레오 6세 시대에 『바실리카 법전』으로 완성되었다.
그는 처음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879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이자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가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1세와 레오의 관계는 882년경에 에우도키아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883년에는 포티오스의 측근이었던 테오도로스 산타발레노스가 레오를 음모 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에, 레오를 궁전 내의 한 방에 유폐했다. 레오는 3년 남짓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당했지만, 886년 7월에 사면되어 후계자의 지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직후, 바실리오스 1세는 사냥 중에 부상을 입었고, 9일 후인 8월 29일에 사망했다. 다만 죽음의 상황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암살설도 있다.
2. 3. 군사적 업적
바실리우스는 제국 육군을 동원하여 동방에서 사라센 및 파울리키아파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처남 크리스토포루스에게 군사를 주어 파울리키아파를 아나톨리아 심장부로 몰아넣었고, 872년에는 주요 거점인 테프라케를 파괴하여 파울리키아파를 거의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17] 제국군은 계속해서 이슬람군을 밀어붙여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중요 요새를 장악했고, 이는 이후 황제들이 이 지역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이 되었다.서유럽에서도 비잔티움군은 연승을 거두었다. 비록 크레타와 시칠리아를 완전히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달마티아, 베네벤토, 오트란토를 점령했고, 876년에는 바리도 손에 넣었다. 이후 공격을 계속하여 사실상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비잔티움 영토로 회복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동안 방치되었던 비잔티움 해군 전력을 강화하여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실리우스 황제의 통치는 이단인 바울파와의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바울파는 상부 유프라테스강의 데프리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아랍과 동맹을 맺고 니케아까지 침략하여 에페소스를 약탈했다. 바실리우스의 장군 크리스토포로스는 872년 바티스 릭스 전투에서 바울파를 격파했고, 지도자 크리소케르의 죽음으로 바울파 국가는 완전히 정복되었다.[17]
바실리우스는 서방에서 제국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한 콘스탄스 2세 (재위 641–668) 이후 최초의 비잔틴 황제였다. 그는 아랍에 대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이 2세 (재위 850–875)와 동맹을 맺고, 아랍의 약탈로부터 아드리아 해를 보호하기 위해 139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비잔틴의 도움으로 루이 2세는 871년 아랍으로부터 바리를 점령했고, 이 도시는 876년 비잔틴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의 비잔틴의 입지는 악화되어, 시라쿠사는 878년 시칠리아 토후국에게 함락되었다. 이는 바실리우스가 시칠리아에서 교회 건설용 대리석을 운반하기 위해 구원 함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 대부분을 잃었지만, 장군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880년에 타란토와 칼라브리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성공은 새로운 비잔틴 지배 시대를 열었다. 비잔틴은 지중해, 특히 아드리아 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립하기 시작했다.[18]


2. 4. 문화 및 법률 정비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선교 사업이 활발해졌고, 포티우스를 다시 불러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의 교육을 맡겼다. 그는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래 3세기 만에 로마 법전에 대한 대대적인 개정에 나서 《프로케이론(''procheiron'', '편람')》과 《에파나고가(''Epanagoga'', '입문')》를 간행하였다. 《에파나고가》 간행은 포티우스가 저술하였다.[16]바실리오스 1세가 착수한 입법 활동 때문에 그는 종종 "두 번째 유스티니아누스"라고 불린다. 바실리오스의 법률은 60권으로 구성된 ''바실리카''와 ''에이사고게''로 알려진 더 작은 법률 편람에 수집되었다. 레오 6세는 이러한 법률 작업을 완성하는 데 책임이 있었다. ''바실리카''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비잔틴 제국의 법률로 남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법률 성문화는 바실리오스에게 살해당한 ''카이사르'' 바르다스의 지시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16]
바실리오스는 치세 말기인 10년간 대대적인 건축사업에도 나섰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보수하고 새로운 모자이크를 입혔으며 낡은 성 사도 성당을 개축했으며 네아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새로운 성당을 지었다. 그 외에도 황궁의 목욕탕과 대문과 수많은 건물을 다시 만들거나 증축했다. 바실리오스는 직접 ''네아 에클레시아'' 대성당과 그의 궁정 홀인 카이누르기온의 건설을 감독했다.[16] 그의 교회 정책은 로마와의 좋은 관계가 특징이었다. 그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포티오스를 추방하고 그의 경쟁자인 이그나티오스를 복원한 것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교황 아드리아노 2세의 지지를 받았다.[1]
2. 5. 죽음
879년 사랑하는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갑작스럽게 죽자, 바실리오스는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깊은 우울증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바실리우스는 특히 아들 레오에게 가혹할 정도로 나쁜 감정을 품고 심하게 매질을 하기도 했다.[19] 바실리우스의 말년에 포티우스는 레오와 바실리우스 사이를 이간질하며 황제를 부추겼다.886년 여름, 바실리우스는 사냥터에서 사고를 당했다. (일설에는 사슴의 뿔에 받혔다고 한다.) 8월 29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0][21] 그의 죽음은 여러 의문을 남겼고, 죽음의 배후에 레오 6세가 있다는 의심도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바실리우스의 뒤를 이어 레오가 황제가 되었다.
3. 가족 관계
바실리오스 1세는 첫 번째 부인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 바르다스
- 아나스타시아: 장군 크리스토퍼와 결혼했다.
- 콘스탄티누스: 868년 1월 황제로 즉위했고, 879년 9월 3일에 사망했다. 게오르기 오스트로고르스키에 따르면 869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이 2세와 엥겔베르가의 딸인 프로방스의 에르멩가르트와 약혼했으나, 871년 바실리오스와 루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결혼 계약이 깨졌다.[23]

바실리오스 1세는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레오 6세: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계승했으며, 미카일 3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 스테파노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이며, 미카일 3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 알렉산드로스: 912년에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계승했다.
- 안나 포르피로게니타: 페트리온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 수녀.
- 헬레나 포르피로게니타: 페트리온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 수녀.
- 마리아 포르피로게니타: 페트리온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 수녀들의 어머니.
4. 평가
바실리우스 1세는 정식 교육과 군사 및 행정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능하고 존경받는 군주로 평가받았다. 그는 방탕한 군주의 측근이었고 계획적인 살인을 통해 권력을 잡았으나, 미하일 3세의 무능함과 불경(不敬)한 행위로 인해 그를 살해했을 때 정치적인 반향은 거의 없었다.[15]
바실리우스 1세는 권력을 잡은 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즉위 초반부터 자신의 왕관을 그리스도에게 공식적으로 헌정함으로써 종교적인 신앙심을 드러냈다. 그는 19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전통적인 경건함과 정통성을 유지했다.[15]
바실리우스 1세의 손자인 콘스탄티노스 7세는 그의 가문에 대한 전설을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바실리우스 1세의 아버지는 고대 아르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파르티아 왕가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황제가 된 후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헤라클레이오스 왕조나 아모리아 왕조에 의해 멸망한 레오 5세와 같이 아르메니아계 왕조나 황제를 권위 부여에 이용하지 않은 점이 특징적이다.
《속 테오파네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실리우스 1세의 부계 조부는 콘스탄티노스 6세와 이레네 황후 통치 시대에 콘스탄티노플로 온 마이케스이며, 모계 조모는 레온이라는 인물의 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아드리아노플에 사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혈통을 이은 가문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던 미망인의 딸이었다고 한다.
바실리우스 1세의 양친이 성수기에 계절 노동을 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그가 빈농이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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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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